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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시대 군사력 강화 시기 조선의 4대 왕으로 즉위를 한 세종은, 

    충녕왕(훗날 세종)은 1397년 태종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지수 3%, 1550자)

    태어나지 않은 왕에게 앞으로 왕이될 세자에게 걸맞은 교육 그는 조선 최고의 학자들 밑에서 유교 고전, 역사, 문학, 무예를 공부했습니다.

    왕위에 오르다

     

    아버지 이방원은 피비린내 나는 투쟁 끝에 왕위에 올라 왕통을 바로 세우려 했지만, 아들의 교육이 뜻대로 되지 않자 결국 장자 상속 원칙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태종은 양녕대군을 계속 왕위에 앉히려 했지만, 양녕대군의 끊임없는 악행으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역사의 아이러니는 장자 상속의 원칙을 버린 것이 선왕에게는 불효가 되고 스스로에 걸림돌이 되었을 것입니다.

    충녕은 성질이 거칠지 않고 가식이 없었기 때문에 좋은 정책의 뿌리를 내리기에 적합했습니다.

    젊은 나이에 왕위를 계승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세종의 애민정치의 길

     

    태종은 21세의 어린 나이의 아들 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충녕을 조선의 4대 왕으로 세웁니다.

    백성들이 존경할 만한 현명한 군주가 되라는 의미로 '성군이 되다'라는 뜻의 세종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태어나지 않은 통치를 형성하는 어린 시절의 재위 초기에는 많은 어려움에 직면했지만, 고난을 통해 배운 과제들은 훗날 한글 창제 등 재위 기간 동안 수많은 정책 개혁에 영향을 미치는 백성들의 곤경에 대한 이해와 공감을 심어주었습니다.

    역경을 딛고 일어나 한국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군주가 된 세종은 초근대 대한민국의 초석을 다진 건설적인 시간들을 부지런히 연습하고,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랑을 실천했다는 사실을 지금 이 순간 되새겨야 할 것입니다.

    신하들의 이해관계를 관리하고 정치를 경영하다 젊은 왕으로서 세종의 주요 임무 중 하나는 궁중 정치를 경영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왕권을 유지하면서 중요한 귀족 연합의 이해관계를 균형 있게 조정

     

    이런 와중에 세종은 이른바 '김도련 노비 뇌물 사건'을 계기로 국면을 전환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됩니다.

    고려 말, 김도련이라는 사람의 부친이 함경도 양민 426명을 부도덕하게 노비로 삼아 자신의 지배하에 관리했는데, 같은 군주였던 권문세가 임임미를 매수하여 이를 허락한 사건입니다.

    하지만 임임미가 실패하고 고려가 망하자 노비들은 다시 양인으로 돌아갔고, 그의 아들 김도련은 426명의 노비와 그 후손 천여 명을 조선 시대에 자신의 노비로 삼기로 결심을 하고 작정을 합니다.

     

    뇌물 스캔들로 태종의 세력을 몰아내다.

     

    김도련은 노비로 조선의 중요한 인물들을 사들여 큰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무려 36구(口)의 노비를 받아들여 뇌물죄의 가장 대표적인 인물로 떠오른 병조판서 조말생부터 시작해 제공된 노비는 총 132구(口 노비를 세는 단위)로 평성부원군, 우의정, 좌의정, 곡산부원군 등 수많은 주요 인사들이 연루되어 있었습니다.

    이 사건은 조선 초기의 가장 큰 뇌물 스캔들이었습니다.

    당시 노비 1인의 시세가 현재 시세로 약 1,000만원의 가치가 있었으며, 노비는 생명체였기 때문에 후손이 있으면 그 가치가 급격히 상승했으니 뇌물죄의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의 통치 네 번째(1422년)에 일어난 일입니다.

    처음에는 크게 주목받지 못하다가 4년 뒤(1426년) 사간원에서 문제를 제기했고, 결국 조말상은 파직되고 유배를 갔지만 세종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함경도로 사람을 보내 조사하도록 명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조말생이 36명의 영주에게 780냥, 우리 돈으로 약 14억 원 상당의 재물을 제공한 사실이 드러나는 등 조말생의 다른 죄가 드러나면서 유배를 가게 되었습니다. 또한 17명의 관리가 132명의 사대부로부터 뒷돈을 받은 사실이 밝혀지자 세종은 유배나 파직에 연루된 자들에게 벌을 내렸습니다.

    이로써 태종의 수구 세력은 몰아내고 세종의 세력이 그 자리를 채울 수 있었습니다.

     

    그 후 1427년 1월(세종 9년), 황희를 영의정으로 승진시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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